지난 11월 23일(목) ‘서울대학교 10-10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미술대학 서양화과에서 강연이 진행됐다. ‘10-10 프로젝트’는 우수한 연구역량과 잠재력을 지닌 학문 분야를 집중 지원해 세계적 수준의 학문 분야로 육성하기 위한 기획으로 언어학과, 사회학과 등 여러 학문 분과가 참여하고 있다. 서양화과 또한 2020년도부터 10-10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이번 강연은 박재훈 작가가 연사로 초청되어 ‘가상세계의 회화적 공간 Painting Space in Virtual World – 3D 시뮬레이션을 통해 가상세계에서 회화적 공간을 구축하기’라는 제목으로 진행됐다.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의 관점에서 새로운 매체와 미디어의 활용이 회화 작업에 어떻게 이뤄질 수 있는지를 돌아보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박재훈 작가는 미술대학 서양화과 학사와 석사를 졸업하고, 네덜란드 헤이그 왕립예술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디지털 조각가로서 국내외에서 활발히 작품 활동을 펼쳐나가는 중이다. 이번 강연을 통해 작가로 살아가면서 겪은 여러 어려움과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던 경험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왜 하필 ‘미디어’ 아트일까?
디지털 툴의 적용이 활발해진 새로운 회화의 시대에서 박재훈 작가는 사진‧영상 편집 기술과 3D 프로그래밍으로 자신의 작품을 구체화해온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게 있어 애니메이션이란 일종의 시뮬레이션이다. 애니메이션은 끊임없이 움직이기에 정적인 오브제를 활용하는 경우보다 더 유동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그는 동적인 뉴미디어 아트가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역동적으로 담아내기에 적절하다고 보았다. 그는 특히 뉴미디어라는 프레임 안에 “순간순간의 이미지를 담아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자신의 관점이 예술을 만났을 때 어떻게 ‘박재훈 작가’만의 스타일을 형성했는지를 회고했다.
박재훈 작가는 조각의 재료가 되는 물질의 본래 목적을 벗어나려 노력해왔다고 밝혔다. 그는 늘 특정 유파나 운동에 국한되지 않는 독창적인 태도로 예술을 대해왔다. 그가 특히 작품의 재료로 주목한 것은 거대한 자연과 주변 사물이다. 이들을 대상으로 두 가지 이상의 기술 매체를 조합한 독특한 조각물을 창작해내어 대중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전하는 것이 박재훈 작가의 목표다. 이는 누구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확장되는 경험을 제공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참신한 관점을 바탕에 둔 작가의 메시지가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전달될 수 있는지가 미술의 가장 중대한 과제임을 절실하게 보여줬다.
“비판은 그 자체로 재밌어요”, 박재훈 작가의 작품세계 엿보기
박재훈 작가의 작품은 불타는 작업실, 단두대만 덩그러니 놓이거나 나뭇가지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방 등 직관적으로 그 의미를 알아차리기 어려운 형상을 보여준다. 이는 그의 영상 예술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네덜란드 유학을 계기로 작품의 주된 소재와 배경을 디지털 세계에서 찾기 시작했는데, 소프트웨어로 구현할 수 있는 오픈소스가 실제 현실에서의 재료들에 비해 무궁무진할 정도로 많았다. 박재훈 작가는 길거리에서 아무 쓰레기를 집어 드는 것처럼 무작위로 온라인의 오픈소스들을 모델링하는 레디메이드 예술을 시도했다고 회상했다. 일상적 기성 용품을 그대로 가져와 새로운 예술적 의의를 부여하는 것이 레디메이드 예술이라고 할 때, 온라인 환경에서도 같은 방식의 예술적 시도가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박재훈 작가는 “비판은 그 자체로 재밌어요, 작가에게든 대중에게든 말이죠”라며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직설적인 방식보다 예술로써 전달하는 것이 왜 더 효과적인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는 외국에서 생활하면서 한국이 처해있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마주할 수 있었고, 이로써 한국의 사회적 문제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 비로소 가능해졌다고 말했다. 특히 ‘분단’이라는 주제에 대해 많이 고민하게 됐다고 한다. ‘경계 위에서’(2020)는 북한, 핵, 미사일, DMZ, 경계석의 문제에 대한 박 작가의 깊은 고민을 보여주는 영상 작업이다. 특강 중에 실제로 작품의 상영이 이뤄졌는데, 그의 조용하면서도 강력한 주장이 청중들에게 생생하게 전달됐다.
박재훈 작가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심혈을 기울여 골라낸 재료와 사물들을 영상미디어라는 새로운 시대를 대표하는 틀 속에 담아왔다. 그는 “예술도 가만히 있지 않고, 사회에 대해 적극적으로 통찰하는 시도를 보여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급속도로 발전하는 기술과 그에 따른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예술 또한 끊임없는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는 미술계가 미술관과 같은 순수하게 분리된 위치를 고수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 명의 디지털 조각가로서의 고뇌가 엿보이는 통찰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고민은 이번 특강을 듣는 모든 이와 앞으로의 예술가들이 끊임없이 제기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박재훈 작가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겪은 고민을 공유하는 기회였던 이번 특강은 본교 구성원들에게도 현시대의 예술이 진정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해주었다.
서울대학교 학생기자
김진영(작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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